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이 예조프 (문단 편집) === 스탈린 밑에서 승승장구하다 === 이후 그의 사람 족치는 능력에 어울리는 자리를 맡게 되어 1933년 숙청[* 소련 공산당에서 '숙청'의 의미는 사실 당에서 일정 비율의 부적격자들을 출당이나 면직 등의 수단을 통해 정기적으로 걸러내는 것에 가깝다. '대숙청'이 특별한 이유는 이런 일반적인 숙청에서 미친 듯이 더 나가서 대규모 체포와 당원 이외의 시민들까지 그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업무를 담당했고 교육이나 경제 쪽보다는 이쪽을 더 잘하는 것으로 판명났다. 1934년 2월, 1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는 한편 조직국원, 당통제위원회 부위원장, 당중앙위원회 산업부장에 임명되는 등 대대적으로 약진한다. 1934년 12월, 당통제위원장으로 승진하는 한편, 1935년 2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로 선거되었다.당통제위원회는 당 내의 비리를 비롯해서 당원의 전반적인 기율을 감사하는 위치였다. 1935년~36년 당원 문서 확인 및 교체 작업을 진두지휘했고 이 작업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너무 심하게 당원들을 갈궈댔다는 것은 당시에도 나오던 말이었다. 그는 매력이 없는 인물이었고,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일단 사적인 생활과는 별개로 공적인 곳에서는 철저하게 청교도적인 인간으로 유명했다. 내전기 헤어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소련 관료들이 넥타이에 양복을 입을 때도 군복을 입고 다녔다. 이런 모습은 1937년 그가 [[레닌훈장]]을 받은 뒤 더 심해졌다. 또한 151cm의 단신이었고 [[니콜라이 부하린|부하린]]은 그의 잔인함과 [[사디즘]]적인 면을 지적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별명은 '피의 난쟁이', '독 품은 난쟁이'가 되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ikolai_Yezhov_conferring_with_Stalin.jpg|width=500]] || || [[이오시프 스탈린]]과 의논하는 예조프 || 예조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에게 아낌없는 충성을 바쳤으며, 1935년 발표한 논문에서는 "(스탈린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필연적으로 폭력과 테러로 귀착된다"라고 주장했다. 이 시기 스탈린은 예조프를 대단히 아꼈으며 그의 건강과 관련된 사소한 사항도 모두 다 챙겨주었다. 당통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당시 [[NKVD]] 위원장이었던 [[겐리흐 야고다]]와 충돌했다. 야고다도 숙청 관련한 일을 당연히 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공산당은 분위기가 달라서 예조프처럼 막 해댄 건 아니었다. 특히 트로츠키 파벌 문제가 당 내에서 불거졌을 때, 야고다는 당 내의 중론을 따라 "야, 적당히 반대파 놈들만 족치고 끝내자"라고 주장했으나 예조프는 아예 전국의 공산당 전체를 겁줘서 숨은 첩자들을 잡아내는 데 반대파들의 재판을 써먹자고 주장했다. 예조프는 곧 [[니콜라이 부하린]]을 기소했으나, 야고다는 이에 대해 문제가 없다는 식의 입장을 내서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렸다. 결국 스탈린은 야고다가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그 자리에 예조프를 내세우게 된다. >예조프 동지를 내무인민위원 직에 임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피하며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다 동지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연합 세력을 적발하는 일에서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합동국가보안부는 이 일에서 4년은 뒤쳐져 있습니다. 모든 당 일꾼과 내무인민위원회의 대다수 주 대표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1936년 9월 25일, 이오시프 스탈린과 [[안드레이 즈다노프|즈다노프]]가 소치에서 카가노비치, 몰로토프 및 정치국 다른 위원들에게 보낸 전보. 스탈린으로부터 부여된 예조프의 첫 번째 임무는 전임 내무인민위원이었던 야고다를 체포하여 조사하는 것이었다. 예조프는 의욕적으로 증거를 조작하여 야고다를 반역자로 기소하고 처형하였다. 뿐만 아니라 야고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처형 전에 옷을 벗기고 고환에 심한 고문을 하도록 하였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1936_genrich_grigorijewitsch_jagoda.jpg]] || || [[겐리흐 야고다]] || 야고다를 첫 번째 희생자로 하여 예조프는 무자비한 '''[[대숙청]]'''을 실행하였다. 1937년~1938년 사이에 50%에서 75%의 고위 공산당원과 [[붉은 군대]] 고급장교들이 처형되거나 혹은 [[시베리아]]에 있는 수용소에서 강제노역형을 받았다. 또한 수십만의 소련의 일반 시민도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이런 시민 중에서는 예조프가 임의로 할당한 체포자 수를 채우기 위해 무고하게 끌려온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내무인민위원부와 군사정보국 내부자에 대한 숙청도 단행하였다. 전임자였던 야고다나 멘진스키가 임명한 요원들을 숙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임명한 요원조차 숙청의 칼날은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무고한 사람 열 명을 처형하더라도, 한 명의 스파이도 놓쳐선 안된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그의 치하였던 1937년~1938년 130만 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68만 명(이 이상일 수도 있다)이 처형되고 나머지는 [[굴라크]]로 끌려갔다. 굴라크에서도 가혹한 생활 조건으로 인해 적어도 14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1937년 10월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은 예조프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삼을 것을 직접 제안하였고, 이는 당연히 통과되어 소련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